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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오호노오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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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의 모후기루의 모후개루의 모후초고, 고이의 모후
초고왕구수왕고이왕책계왕
구수의 모후사반의 모후책계의 모후보과부인
분서왕비류왕근초고왕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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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진씨비지의 딸왕대비창의 모후
위덕왕혜왕법왕무왕
아좌의 모후선의 모후왕후왕후 사택씨
무왕의자왕풍왕
선화공주은고부인왕후 오오씨




1. 개요
2. 생애
3. 기록

多臣氏
생몰년도 미상


1. 개요[편집]


백제부흥운동 시기 옹립된 풍왕의 부인. 일본인으로 오호노오미 코모시키(多臣蔣敷)[1]의 누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성만 전해진다.


2. 생애[편집]


백제부흥군을 이끄는 귀실복신 등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했고[2], 일본 측은 부여풍과 그의 처자들, 부여충승[3] 등을 일본에서 661년 9월 백제로 파견하였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참패한 이후 부여풍고구려로 망명했으나 고구려 멸망 이후 나당연합군에게 붙잡혔는데, 왕후 오오씨나 부여풍의 자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3. 기록[편집]


(660년) 겨울 10월 ...(중략)... 百濟國이 곤궁에 빠져 와서 우리나라에 귀의하며 ‘본국에 화란이 있으나, 의지하여 알릴 곳이 없다. 창을 베고 자며 쓸개를 핥는다. 반드시 구원해 달라’고 멀리서 와 표를 올려 아뢰니 뜻을 빼앗기 어렵다. 장군들에게 나누어 명하여 여러 길로 함께 나아가게 하라. 구름처럼 모이고 번개처럼 움직여 함께 沙㖨에 모여, 악한 무리들을 베고 저 위급한 나라를 도우라. 마땅히 有司들은 함께 참여하여 예를 갖추어 출발시켜 보내라”고 운운하였다. 왕자 豐璋 및 처자와 그 숙부 충승(忠勝) 등을 보냈다. 그들이 떠난 때는 7년조에 보인다. 어떤 책에는 “천황이 풍장(豐璋)을 세워 왕을 삼았으며 새상(塞上)을 세워 보(輔)로 삼고, 예를 갖추어 떠나보냈다”고 하였다.

冬十月...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枕戈嘗膽 必存拯救 遠來表啓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雲會雷動 俱集沙㖨 翦其鯨鯢 紓彼倒懸 宜有司 具爲與之 以禮發遣 云云送王子豐璋及妻子 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 立豐璋爲王 立塞上爲輔 而以禮發遣焉

일본서기 권 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661년) 9월 황태자(皇太子)가 長津宮에서 織冠을 백제(百濟) 왕자인 풍장(豐璋)에게 주고, 또 오호노오미코모시키(多臣蔣敷)의 누이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大山下 狹井連檳榔, 小山下 秦造田來津을 보내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에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豐璋이 나라(백제)에 들어갈 때 福信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九月 皇太子御長津宮 以織冠 授於百濟王子豐璋 復以多臣蔣敷之妹妻之焉 乃遣大山下狹井連檳榔·小山下秦造田來津 率軍五千餘 衛送於本鄕 於是 豐璋入國之時 福信迎來 稽首奉國朝政 皆悉委焉

일본서기 권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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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사기를 저술한 오노 야스마로(太安麻呂)의 조부로 알려져 있다.[2]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그의 아들들은 죄다 당나라로 압송된 상태였다. 또한 백제부흥군을 일으킨 귀실복신이나 흑치상지, 부여자신은 부여씨에서 분가한 가문(귀실씨, 흑치씨)이거나 방계 왕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 옹립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3] 혹은 부여새상.